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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y Notes

에르고딕 텍스트 사례

영화 <블레이드 러너>, <미지와의 조우>, <맨온파이어>, <나는 전설이다>, <아메리칸 갱스터>, <포가튼>, <검은집>, <디센트>, <브레이크업>, <멘인블랙2>, <위험한 정사> 등은 여러 결말이 있다. 결말이 여러가지인 이유는 그야말로 여러가지이다. 극장에 따라 결말이 다른 경우도 있고, 심의 등의 이유로 감독이 의도한 결말대로 상영하지 못한 경우 감독판 DVD에 개봉 결말과 다른 결말을 포함시킨 경우가 많다고 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는 82년 개봉 이후 여러차례 수정했는데, 각각의 버전을 수집하는 콜렉터도 있다고 한다. 아래는 영화 <나는 전설이다>의 극장판과 다른 버젼의 결말을 담은 무비 클립이다.



영화는 대개 리니어한 서사구조를 지닌다. 개인의 머리 속에서는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은 물론 전후에도 수많은 분기점을 거치고 자신의 경험들과 연결하기도 하는 등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영화 자체가 제공하는 컨텐츠는 변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위에 제시한 영화들은 내가 선택하는 극장, 혹은 DVD로 감상한다는 행동에 따라 다른 결말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에르고딕적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고 본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UCC등을 활용, 영화의 엔딩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일단 아래의 동영상을 보자.



스타워즈 에피소드 3의 엔딩을 재미있게 각색한 무비 클립이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방대한 스토리와 짜임새있는 플롯, 정교한 세계관이 돗보이는데 특히 이 엔딩은 그 중에서도 장엄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유머와 위트가 가득 넘치는 이 변형판 엔딩의 제작자는 이 엄숙한 분위기를 특유의 똘끼(선생님 죄송합니다 ㅠ)를 발휘, 보는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데 성공한다. 에스펜 올셋이 말하듯, 에르고딕이라는 형식은 선형적인 서사구조와 대치된다기 보다는 상호 복합적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영화의 여러가지 엔딩이 약한 정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본다.

이에 반해 사용자의 개입에 따른 결과가 이야기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디지털 게임을 빼놓을 수 없다. 디지털 게임은 대부분 비선형적인 서사구조를 지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일본 게임 중에 좋은 예가 많다. 먼저 국가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이 있다. KOEI사의 <삼국지> 시리즈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연애/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 있다(야게임도 포함된다.) <프린세스메이커> 시리즈나 <동급생>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동급생2>는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여성에게 '작업'하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인데, 이동 거리와 시간 등의 제약 조건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된다. 게임 중 발생하는 각종 이벤트는 이러한 제한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즉, 내가 오늘 점심 길을 가다가 A라는 동급생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셨다면, (적어도 같은 시간에) B라는 동급생과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동급생2>는 시간과 제약조건의 밸런스가 잘 맞는 게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지금까지도 수없이 쏟아져나오고 있는 비슷한 류의 게임은 기본적으로 <동급생2>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Visual Novel이라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Visual Novel은 일본에서 시작된 것으로 텍스트와 관련된 그래픽(이미지)로 이루어져있다. 이를 게임으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그러한 논란을 차치하더라도 에르고딕 문학의 좋은 예는 될 수 있을 것이다. Visual Novel에서 독자(혹은 플레이어)는 텍스트를 읽고 그래픽(이미지)를 본다. 그러나 기존의 선형적 서사와는 달리 진행 도중 여러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이 선택에 따라 이후의 내용이 바뀐다.

위에서 언급한 일본 게임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게임들도 있다. 주로 미국의 게임이 이런데, 일본 게임들에서는 몇몇 분기점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데 비해, 미국의 게임들은 비교적 자유도가 높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국의 게임들의 대표적인 예로는 시리즈가 있다. 혹자는 이 게임을 두고 '돌아다니면서 두들겨 패는 게임'이라고 칭했는데, 이 말은 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말 그대로 아무데나 가서 보이는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또한 <심시티>시리즈, <타이쿤>시리즈처럼 배경만 주어지고 그 곳에서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많이 열려있는 게임도 있다. <세컨드 라이프>는 자유도의 측면을 극대화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일본과 미국의 게임을 대비하였으나, 이런 대비 구조에 포함하기 어렵지만 게임의 에르고딕 문학적 측면을 관찰할 수 있는 게임도 많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 <스타크래프트>는 게임을 시작할 때 종족이나 인물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 분기는 앞으로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상당부분 결정한다.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특정 병기나 기술 따위가 종족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게임 진행시에는 몇가지 제약들을 제외하면 선택의 폭이 상당히 넓다.

이와 비슷하게 <바이오해저드>는 게임 초반에 Jill이나 Chris라는 인물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Jill을 선택했을 경우 게임을 진행하는 도중에 Chris를 구출할 것인가, 말 것인가 혹은 Barry라는 인물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등,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엔딩은 기본적으로 헬기를 타고 라쿤시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Jill이 Chris를 구했느냐, Barry를 죽였느냐의 여부에 따라 헬기에 탑승한 인원이 달라진다.

또 다른 예로는 콘솔 게임기 SNES로 출시되어 크게 히트했던 <크로노 트리거>라는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은 처음 게임을 진행할 때에는 (게임의 특성상 선택과 결과가 있긴 하지만) 비교적 주어진 서사 구조를 따라가지만, 게임을 한 번 정상적으로 클리어하면, 그 이후에 게임의 진행은 원하는 시점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선형적인 서사구조의 특정 지점부터 시작할 수 있는 예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 언제 어디서나 벌어진다는 의미의 유비쿼터스 게임 역시 에르고딕 서사의 측면이 매우 중요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유비쿼터스 게임은 널리 퍼진 방식의 게임은 아니지만 개개인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게임이라 할 수 있으며 비선형적 서사로도 볼 수 있다. 는 일상공간에서 진행되는 팀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무기는 "당신 오늘 멋지군요" 따위의 친절한 세가지 말이다.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팀들끼리 몰려다니면서 타겟을 찾아내서 공격해야 한다. 그러나 일상에는 이 게임을 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게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거나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만약 공격한 대상이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말한 사람이 이기지만, 동시에 무기를 사용한다면 가위-바위-보의 원칙대로 물고 물리는 무기의 파워에 따라 승패가 나뉜다.
참고 사이트: http://www.cruelgame.com/

지금까지 여러 엔딩이 있는 영화와 분기점이 다양한 게임을 에르고딕 서사의 예로 들어보았다. 이 외에도 수많은 예가 있겠으나 비선형적 서사라는 것을 생각해보는 동안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다른 때에, 다른 곳에서 태어나 모두 다른 경험을 하고 살고 죽는다. 피부색도, 입는 옷도, 먹는 것도 다르다. 개인의 이야기도 그렇다. 출발점도 다르고 진행 과정도 다르며 우리의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도 모두 제각각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 역시 에르고딕적 서사로 볼 수 있지 않을까?